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구룡포 출장길에..
일본인 가옥거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봤다..
엠모드로..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거리 재정비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선정이라는 일식집인데..
지금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담가지지 말고 들어와 구경하라는데..
부담이 되었다.. 헐..
다토이 여관 건물..
일본이 조선을 강제병합한 경술국치가 올 8월이면 100년을 맞는다.
당시를 거슬러 돌아보면 일본이 기를 쓰고 침략했던 곳은 바로 바다와 인접한 곳이었다.
이 가운데 불과 100여 년 전 원래 마을이 없던 곳이었지만 일본인들이 들어와 조성한 구룡포는 일제의 근대역사가 송두리째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국내 몇 안 되는 근대 흔적이 남아있다고 해서 포항시가 관광자원화에 나서고 있는 구룡포 일본가옥 거리.
이 거리가 있는 뒷산 언덕은 구룡포공원으로 불린다.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으로 오르는 67개의 계단 양편에는 현재 왼쪽으로 61개 오른쪽으로 59개 모두 120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비를 자세히 보면 앞면은 한국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뒷면은 시멘트 덧칠이 돼 있다.
1944년 이 돌기둥에는 구룡포항을 조성하는 데 일조한 구룡포 이주 원조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하지만 광복으로 일본인들이 쫓겨 가고 몇 년이 흐른 뒤 돌기둥의 비문은 시멘트로 감춰진다.
그 뒤 1960년 구룡포 주민들은 이 나라를 위해 산화한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봉안할 충혼각을 건립하게 된다.
충혼각을 세우는 과정에 도움을 준 후원자들의 이름이 다시 앞뒤를 돌려 세운 돌기둥에 각인됐고 현재에 이르게 됐다.
최근에는 당시 시멘트 덧칠을 두고 구룡포 주민들의 항일 또는 반일 흔적이라면서 해석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은 시멘트로 덮혀 있는 일본인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공덕비도 마찬가지로 반일흔적의 상징처럼 해석해 왔다.
당시 시멘트 덧칠은 대한청년단이 주도했다.
그러나 구룡포 대한청년단은 해방 후 좌우익이 충돌하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해 권력을 차지한 무소불위의 세력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에게 밉보이는 사람들은 지금의 호미곶면 구만리 앞바다와 장기면 모포리 앞바다에서 몸에 돌을 달아 수장됐다고 한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이던 시대에 얼마나 악행을 일삼던 세력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데도 이들을 반일투사로 보거나 일본에 분노하고 항거한 사람들로 과장한다면 진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억울할까?
그들의 목적은 반일이 아니라 권력획득이었는데도 그들의 행동을 항일에만 초점을 맞춰야만 할까?
그런데 최근에야 남아 있는 120개의 돌기둥 가운데 시멘트로 발라지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돌기둥 하나가 발견됐다.
그것도 바로 구룡포공원에 우뚝 서 있는 일본인 공덕비의 주인공인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이름이 새겨진 비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모두 130여개가 넘었다고 하는 돌기둥의 일본인 이름이 모두 시멘트로 덮였는데 유독 도가와 야스브로(十河 彌三郞)의 돌기둥만 온전한 이유는 뭘까?
그러면 해방 후 반일과 항거로 저질렀다고 하는 시멘트 칠이 도가와(十河) 송덕비와는 달리 도가와(十河)의 돌기둥은 왜 훼손이 안됐느냐에 대한 답은 무얼까?
한일병합 100주년, 호국의 달을 맞아 필자는 가슴에 한을 묻고 사라진 순국열사들을 생각하면서 시멘트 덧칠만 했던 항일에 부끄러워 머리를 들 수 없다.
(K뉴스에서 발췌)
일제시대 조선인들의 피와 땀으로 구룡포항을 조성한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
해방 후 전면의 비문을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공원에서 내려다본 구룡포 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