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을 관하다..

영주.. 소수서원-1

수빈사랑 2012. 7. 23. 17:39

F11을 누르고 보시면 편리합니다..

 

 

 

비오는 주말..

영주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엠모드로..

 

날씨가 흐린 관계로..

ISO 한스텝 올려주고..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서원이자 최초로 사액을 받은 서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정규 역사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소수서원은 세워진 이유와 시대적인 배경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찾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세종의 둘째아들이자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은 '명분'도 없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영월로 보내버리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넷째 동생인 금성대군을 이곳 순흥고을에 유배시켜 버린다..

 

유배 온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거사를 추진했으나,

순흥관아 노비의 밀고로 계획이 발각되어 엄청난 화를 입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이곳 순흥고을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것이다..

 

금성대군은 반역죄로 처형되고, 세조가 보낸 관군에 의해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이들과 고을주민 모두 떼죽음을 당하고,

순흥안씨의 집성촌인 이곳에서 안씨 일족만 700여명이 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죽계천 10리가 모두 핏빛이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도 이곳에 그때의 핏빛 강물이 그쳤다는 "피끝"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있다..

 

그리고 종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맡아오던 순흥도호부(지금의 제천, 단양, 풍기, 영주지역을 관리)와 향교를 없애 버리고, 숙수사까지 불태워 버렸다..

려말선초 '북송남순'(북쪽으로는 송악, 남쪽에는 순흥)이라고 할 정도의 당시 큰고을을 없애고 '마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순흥은 고려시대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전래시킨 대학자 안향의 고향이다..

그 주자학은 조선의 통치이념이 되었고 이곳 주민들의 자존심도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 순흥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지역의 민심이 오죽했을까..

 

선비의 본향이었던 순흥이 글방하나 없는 곳으로 전락된지 90년후 정권이 네번이나 바뀌고..

풍기군수 주세붕이 부임한다..

 

학문을 좋아했던 그는 지역의 학문증진과 민심을 함께 얻고자 향교를 세우지만, 한번 돌아선 민심은 쉬 돌아오리 만무하고 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 대안으로 찾은 방안이 바로 이곳 순흥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안향'선생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세조때 불태워진 숙수사터에(지금의 소수서원 자리) 안향의 영정을 봉안 할 사당(소수서원의 문성공묘)을 지어주고,

거기에 덧붙여 공부방을 하나 덧붙여 세우고 백운동서원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탄생된 것이다..

 

세조에 의해 짓밟힌 '명분론'을 회복하기 위한 구심점을 찾던 조정에서도 희소식이었다..

중종과 조정대신들도 서원을 국가적 사업으로 일으키기로 하고,

백운동서원 대신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임금이 하한 편)과 서적, 서원을 관리할 노비, 수만평의 서원전(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로서 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소수서원 초입에는 수많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곳에도 외삼문 앞에 학자수를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두그루나 심어져 있지만,

소수서원의 진정한 의미의 학자수는 바로 곧은 절개를 지닌 이 소나무가 아닐까 싶다..

 

 

 

 

 

 

 

 

 

 

 

 

 

다른 서원에는 입구에 홍살문이 있지만 이곳에는 예전의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때의 당간지주가 세워져 있다..

(서원에 홍살문은 소수서원 다음으로 두번째로 세워진 함양 남계서원부터 세워진다..)

 

 

 

 

 

 

 

물건너 취한대..

 

 

 

 

 

 

 

 

 

 

 

 

 

 

 

물건너 '경'자바위..

아래의 붉은 '경'자는 주세붕이 세겼고, 위쪽의 '백운동'은 퇴계가 세겼다..

 

흔히들 귀신이 밤마다 시끄럽게 굴어 이를 누르기 위해 '경'자를 세겼다 애매하게 해석을 하지만..

 

장영훈교수님의 풍수학적인 해설로 풀이하면 전혀 다른 답이 나온다..

 

사대부 풍수의 대가였던, 주세붕과 퇴계 모두 이 바위는 풍수학적으로 봤을때 서원을 노려보고 있는 호랑이 머리에 해당한다..

좌청룡 우백호의 관점에서 봤을때 호랑이는 우측에 있어야 하지만, 소수서원을 기준으로 봤을때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해서 주세붕은 호랑이 아가리에 소수서원을 공경하라는 붉은색의 '경'자를 새겼고,

퇴계는 호랑이 눈에 '백운'을 새겨 흰구름으로 가리려고 흰색의 '백운동'이라는 글자를 새겨 한번 더 자물통을 채워버린 것이다..

 

알고 보면 참 재미있다..

 

 

 

 

 

 

 

물기 머금은 소나무..

 

 

 

 

 

 

 

외삼문 앞의 경렴정..

서원내에는 타서원처럼 풍류를 감상하고 즐기는 공간인 누각이 없다..

소수서원에는 바로 이 경렴정과 물건너 취한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냥 정자이구나"하고 그냥 넘어갈 수 도 있지만, 자세히 앉은 방향을 보면 서원내부의 문성공묘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

 

 

 

 

 

 

 

그리고 정자 내부에는 이렇게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그런데 이 현판을 자세히 보면..

 

 

 

 

 

 

 

정자의 마지막획의 용트림치는 일부분이 잘려져 있는걸 알 수 있다..

소수서원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경렴정 자리를 확인시키기 위해 용트림 모양의 글자를 새겨 놓았으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민족정기를 끊어놓는 하나의 방안으로 저렇게 정자의 용트림을 훼손하는 지랄까지 저질렀다고 한다..

산꼭대기에 쇠말뚝 박는것으로도 모자라 이런짓까지.. 망할눔들..

 

 

 

 

 

 

 

현판 우측에는 주세붕선생이 쓴 글이 걸려 있고,

 

 

 

                  산은 조심스레 서 있는데

 

                  시내(溪)는 하염없이 소리를 낸다

 

                  유인(幽人)은 마음에 느낌이 있어

 

                  한밤 외딴 정자에 기대었네

 

                                 -신재 주세붕 -

 

 

 

 

 

 

 

 

 

좌측에는 퇴계선생이 쓴 글이 걸려 있다..

 

 

 

 

                  풀에도 남모를 맑은 뜻이 있고

 

                  시내도 다하지 않는 소리 머금없네.

 

                  노니는 이 마치 믿지 못하는 듯 하지만

 

                  맑고 깨끗하게 빈 정자 하나 서 있네.

 

                  산은 공경한 빛으로 섰으며

 

                  시내는 미미한 소리로 흐르고

 

                  그윽한 사람 마음 모임이 있어

 

                  반밤을 노은 정자에 의지했네.

 

                                         -퇴계 이황 -

 

 

 

 

 

 

 

외삼문 앞의 성생단..(서원에서 제사지낼때 쓰이는 고기를 검사하는 곳)

다른 서원들 처럼 돌로 만들지 않고 흙으로 단을 만들었다..

 

 

 

 

 

 

 

외삼문을 통해 본 소수서원의 강당인 명륜당..

보통 서원에서 바깥 정문을 외삼문이라 하고 사당 정문을 내삼문이라 칭하지만,

소수서원의 외삼문은 엄밀히 말해 세칸짜리 문인 외삼문(外三門)이 아니라 독특하게 한칸, 외문(外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관심있게 봐야 할 부분이다..

명륜당 건물은 숙수사 법당터에 세워진 네칸 건물이다..

네칸짜리 건물은 정중앙에 기둥이 놓이기 때문에 아래사진처럼 가운데 현판을 걸 수가 없다..

그래서 세칸짜리 남쪽 측면에 현판을 달았다..

 

 

 

 

 

 

 

이와 같이 측면이 정면이 된 셈이다..

분명 왼쪽은 세칸이고, 오른쪽은 네칸이다..

 

 

 

 

 

 

 

정면이 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네칸이기 때문에 중앙에 현판을 달 수가 없다..

 

 

 

 

 

 

 

문성공묘쪽에서 바라본 명륜당..

 

 

 

 

 

 

 

참고로, 소수서원 명륜당과 같이 측면에 현판이 걸려 있어서 측면이 정면이 된 부석사 범종루..

 

 

 

 

 

 

 

안향선생의 영정을 모신 문성공묘..

묘라고 해서 실제 무덤이 있는게 아니라 위폐를 모신 가묘이다..

 

최초로 세워진 소수서원은 배향이 최우선시 되었던 배향중심의 음택서원이다..

문성공 안향선생의 위폐를 모신 이곳이 소수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며,

서원의 건물 배치상 소백산의 정기가 가장 먼저 받는 잉(孕)부분에 위치해 있다.

 

소수서원은 강학이 아닌 배향을 우선시 하는 음택서원이므로 이곳 문성공묘를 중심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전상후하(前上後下)의 건물배치를 보인다..

 

 

 

 

 

 

묘(廟)는 당(堂)보다 높은 명칭이다..

타서원에서는 사당을 OO당이라 부르지만 이곳 소수서원은 사당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묘라 칭하는 것이다..

 

 

 

 

 

 

역시나 이곳도 정료대는 하나뿐이다..

 

 

 

 

 

 

서원 뒷쪽(엄밀히 말하면 좌측 좌하부분) 전사청..

담장 아래 부분은 지맥선에 해당..

 

 

 

 

 

 

소백산 비로봉에서 뻗어내린 정기가 뒷쪽 영구봉을 통해 서원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부분인 잉(孕)부분..

 

 

 

 

 

 

 

 

 

 

 

 

장서각..

 

 

 

 

 

전사청..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노비들이 들락거려야 했으니 우상좌하(右上左下), 전상후하(前上後下)의 원칙에 따라 문성공묘 좌측, 뒷쪽 공간에 배치했다..

전사청 뒤로는 서원을 관리하던 노비들의 공간인 고직사가 보인다..

 

 

 

 

 

 

영정각..

 

 

 

 

 

 

영정각 내부에는 주자학의 근원인 주자 영정과,

 

 

 

 

 

 

국보로 지정된 안향선생 영정도 있고,

 

 

 

 

 

 

보물로 지정된 소수서원의 창건자 주세붕선생도 있고,

 

 

 

 

 

 

한음 이덕형 선생도 있고,

 

 

 

 

 

 

허목선생 영정..

 

 

 

 

 

 

이원익선생 영정도 있다..

 

 

 

 

 

 

영정각 앞에는 맑은날 나무를 꽂아 드리우는 그림자로 시간을 알았던 일영대가 있다.

 

 

 

 

 

 

이곳 소수서원의 동재인 직방재..

서원의 원장과 교수들이 기거했던 공간이다..

우상(右上)의 공간인 우백호에 해당하며 정신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서재인 일신재..

좌하(左下)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공간이며, 유생들의 기거공간이다..

공부를 통해 날로 새로워지라는 의미..

 

 

 

 

 

 

자세히 보면 직방재와 일신재의 기단 높이가 다르다..

직방재가 스승이 머물던 상(上)의 공간이므로 아랫목에 해당하고,

일신재가 원생들이 머물던 하(下)의 공간이므로 윗목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단의 높이를 서로 달리했던 것이다..

 

같은 하나의 건물에 두개의 공간이지만 알고 보면 큰 차이를 보인다..

 

혹자들은 건물 배치라든지 모든 부분이 서원 건립 초기에 해당되고 정립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에 건물의 배치가 어수선하고 명료하지 못하다고 얘기하지만,

풍수학적으로 해석하면 서원의 입지, 건물 배치등 모든 부분들이 치밀한 계산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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