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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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관에서 "외규장각 의궤와 조선왕실 혼례이야기"란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작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렸을때 못가서 아쉬웠는데, 대구에서 특별전이 열리니 감사할 따름이다.
수빈이 손잡고 휘리릭 다녀왔다..
특히나 영조가 정성왕후가 죽은 뒤 66세때 15세의 정선왕후 김씨를 새로운 왕비로 맞아 들일때의 장면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는
가히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의 규모로 50면에 달하고 397필의 말과 1,299명의 인물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정조와 외규장각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해에 규장각을 정식 국가기관으로 발족시켰다.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출판과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한 기구였다.
이후 1782년에 강화도 행궁에 외규장각을 완공하여 어람용 의궤등 중요한 자료들을 옮겨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하였다.
규장각에 보관하던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로 옮겨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되어 이곳을 '규외장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사건을 구실로 '병잉양요'를 일으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분전으로 수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대량의 은괴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궤를 비롯한 189존 340여책,
기타 자료들을 약탈하고, 간화도의 장녕전, 외규장각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퇴각하였다.
과거속에 묻혀졌던 외규장각 의궤는 프랑스에 살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그 존재와 행방이 알려졌다.
이후 국내 학술단체와 정부가 중심이 되어 의궤의 반환을 추진하였고,
1993년 반환받은 1권을 포함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왔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145년만인 2011년에 모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조선왕실 의례 보고서, 의궤
의궤란 '의식의 궤범'이란 말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국조오례의]가 국가의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책이라면, 의궤는 이러한 의례를 예법에 맞게 시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다.
즉, 의궤는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의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의궤는 조선시대에 거행했던 국가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의궤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의궤는 모두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고, 그 이전의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의궤는 18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종류와 숫자가 늘어난다.
18세기는 국가의 각종 문물과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정비하는 시기였으므로, 국가행사의 보고서인 의궤 역시 많이 만들어 졌다.
의궤는 보통 5~9부 내외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열람자나 보관처에 따라 어람용(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의궤)과 분상용(여러곳에 나누어 보관한 의궤)으로 구분되었다.
- 국립대구박물관 유인물 참조.